서울 외환시장은 평일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 30분까지 열리며, 그 시간 동안 은행의 외환거래를 담당하는 딜링룸은 전투 현장을 방불케 한다. 외화를 매매하려는 기업과 금융기관의 주문이 쏟아지면, 외환딜러들은 분주하게 호가를 외치며 키보드를 두드려 거래를 체결한다. 이들은 보통 5~6개의 모니터로 실시간 국제 뉴스와 주요 경제 지표를 살펴보며 시장 흐름에 반응한다. 0.1초 차이로 수억 원이 오갈 수 있는 세계다.
이러한 외환시장이 활발히 돌아가는 배경에는 환율제도의 특성이 있다. 환율제도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하나는 일정한 기준 환율을 유지하는 고정환율제, 다른 하나는 시장 수요와 공급에 따라 환율이 변동하는 변동환율제다. 한국은 후자를 채택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선진국도 변동환율제를 운용 중이다. 고정환율제는 자국 통화를 달러 등 특정 통화에 연동시키는 방식으로, 환율 급등락의 충격을 줄이고 정부가 시장에 대한 통제력을 유지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이런 체제를 유지하려면 자본의 이동을 통제해야 하고, 경제위기 시 외환 투기의 표적이 될 위험도 존재한다.
반면, 변동환율제는 자본의 흐름이 자유롭고, 외부 충격에 대해 환율이 자연스럽게 조정되는 유연성이 있다. 예를 들어 국내에 달러 유입이 많아지면 환율이 하락하고, 수요가 많아지면 상승하는 식이다. 하지만 시장 변동성이 그대로 경제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신흥국이나 금융 시스템이 취약한 국가에겐 불안정성을 키울 수 있다.
환율제도에 ‘정답’은 없다는 게 경제학계의 대체적 견해다. 각국은 자국의 경제 상황과 구조적 여건을 바탕으로 적절한 제도를 택해야 한다. 하지만 세 가지 정책 목표인 통화정책의 독립성, 자본 이동의 자유, 환율 안정성은 동시에 달성할 수 없다는 ‘삼불 원칙(impossible trinity)'이 존재한다. 전 세계적으로 약 35%는 변동환율, 15%는 고정환율, 나머지 절반은 두 방식을 절충한 중간 형태의 제도를 채택하고 있다.
국제무역을 수행하는 국가들은 종종 환율을 인위적으로 낮춰 수출 경쟁력을 높이고자 하는 유혹을 받는다. 통화가치가 낮아지면 자국 제품이 외국에서 더 싸게 팔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처럼 무역적자에 민감한 국가는 이런 시도를 경계한다. 미국 재무부는 매년 두 차례 의회에 환율 관련 보고서를 제출하며, 환율 조작이 의심되는 국가를 심층분석 대상국 또는 환율조작국으로 분류한다. 이 근거는 1988년 종합무역법과 2015년 교역 촉진법(BHC 법)에 명시되어 있다.
환율조작국으로 분류되기 위해선 세 가지 조건을 모두 만족해야 한다. 대미 무역흑자가 연간 200억 달러를 넘고, 경상수지 흑자가 GDP의 2% 이상이며, 외환시장에 개입해 GDP의 2%를 초과하는 외환을 순매수한 경우다. 이 중 두 가지 요건만 충족하거나 무역흑자가 과도하면 ‘관찰 대상국’으로 지정된다.
환율조작국으로 지정된다고 해서 당장 강력한 제재가 가해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미국 정부의 조달사업에서 해당국 제품을 배제하거나 미국 기업이 해당국에 투자할 때 공적 보증을 제공하지 않는 등 제한 조치가 따른다. 더 큰 문제는 이를 구실 삼아 미국이 무역 보복에 나설 수 있다는 점과, 해당국의 국제적 신뢰도가 저하될 수 있다는 데 있다.
우리나라는 1988년 환율조작국으로 지정됐다가 2년 만에 해제된 이력이 있다. 이후로는 꾸준히 관찰 대상국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1998년 이후 미국은 환율조작국 지정을 자제해 왔지만, 2019년 미·중 무역 갈등이 격화되던 시기 중국을 환율조작국으로 전격 지정했다가 협상이 타결되자 반년 만에 해제한 바 있다. 이처럼 환율조작국 지정을 협상의 카드로 활용하기도 한다.
한편, 환율과 금리의 상호작용은 ‘캐리 트레이드’라는 투자 방식에서도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캐리 트레이드는 낮은 금리의 통화로 자금을 조달해 금리가 높은 국가의 자산에 투자하여 차익을 노리는 전략이다. 대표적인 사례는 ‘엔 캐리 트레이드’다. 일본이 1990년대 장기 경기침체로 초저금리를 유지하자, 글로벌 투자자들이 엔화를 빌려 영국, 호주, 브라질 등의 고금리 국가에 투자했다. 일본 개인투자자들까지 나서자, ‘와타나베 부인’이라는 별명이 등장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에는 미국이 초저금리 정책을 펴면서 ‘달러 캐리 트레이드’가 주류가 되었고, 유럽에서는 유로화를 활용한 거래도 증가했다. 이러한 캐리 자금은 고수익을 좇는 ‘핫 머니’로 분류되며, 투자 매력이 줄어들면 언제든 철수해 버릴 수 있어 신흥국 경제에는 리스크가 될 수 있다. 또 금리 차가 아무리 유리해도 환율이 불리하게 움직이면 환차손으로 전체 수익이 날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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