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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

시뇨리지 & 비둘기파/매파 & 테일러 준칙 & 현금 없는 사회

by 부자섭 2025. 5.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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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만 원권 지폐는 신사임당의 초상화로 잘 알려졌지만, 실제 제조 비용은 약 100~200원 수준으로 추정된다. 한국은행이 5만 원권 한 장을 발행하면 장부상 자산은 단숨에 5만원 증가하며, 약 4만9800원의 이익이 발생한다. 이처럼 지폐의 액면가와 제작 원가의 차이에서 생기는 이득을 '화폐 주조차익', 또는 프랑스어로 ‘시뇨리지’라 한다. 이 용어는 중세 유럽의 영주인 ‘시뇨르’에서 유래했는데, 당시 그들은 조폐권을 가지고 있었고, 금이나 은에 불순물을 섞어 실제 가치보다 낮은 화폐를 만들어 그 차익을 챙기곤 했다.

오늘날에는 각국 중앙은행이 화폐 발행 권한을 갖는다. 특히 미국 연방준비제도(Fed)는 달러라는 기축통화를 발행할 수 있어 훨씬 큰 시뇨리지를 누린다. 예를 들어 Fed가 1억 달러를 찍어내면, 전 세계 어디서든 그 가치는 인정받는다. 이론적으로는 미국이 부채가 많아도 달러를 더 인쇄하면 갚을 수 있는 구조다. 그래서 기축통화를 가진 국가는 경제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되며, 이를 '시뇨리지 효과'라고 부른다.

미국은 실제로 재정적자가 지속되는 상황에서도 국채 발행과 통화 공급을 통해 경제를 유지해 왔다. 그러나 돈을 많이 찍어낼수록 시뇨리지 효과는 커지지만, 동시에 부작용도 커진다. 가장 큰 문제는 인플레이션이다. 화폐 공급이 늘어나면 화폐 가치가 하락하고, 이는 곧 물가 상승으로 이어진다. 이런 방식의 재정 조달은 국민 모두에게 간접적인 세금을 부과하는 효과를 가져오기 때문에 '인플레이션 조세'라고도 불린다.

이러한 이유로 비트코인 등 가상자산의 지지자들은 중앙은행의 시뇨리지 독점과 인플레이션 조세에 반대한다. 그들은 탈중앙화된 가상화폐를 통해 기존 화폐 체계를 대체하길 원하며, 주요국 정부가 이를 규제하려는 배경에도 '화폐 주권'을 지키려는 의도가 있다고 본다.

중앙은행 관련 보도에서 자주 등장하는 단어 중 하나는 '매파'와 '비둘기파'다. 매파는 인플레이션 억제를 중시하며 금리 인상을 선호하는 반면, 비둘기파는 경기부양을 우선시하며 금리 인하를 지지한다. 두 입장은 중앙은행 내 통화정책 결정 과정에서 종종 충돌한다.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는 이들을 '올빼미파'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러한 용어는 원래 외교·안보 영역에서 유래했다. 1960년대 베트남 전쟁 당시 군사적 확장을 주장한 강경파는 ‘매’로, 전쟁 억제를 주장한 온건파는 ‘비둘기’로 불렸다. 이후 이 비유가 통화정책 분야로 확장된 것이다.

전문가들은 중앙은행 인사들을 매파 또는 비둘기파로 분류해 향후 금리 정책을 예측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구분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경제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예를 들어, 2014년부터 2018년까지 Fed 의장을 지낸 재닛 옐런은 1990년대에는 매파로 평가받았지만, 의장 시절에는 보다 비둘기파적인 정책을 펼쳤다.

그렇다면 중앙은행은 어떤 기준으로 기준금리를 정할까? 주요국 중앙은행은 ‘테일러 준칙(Taylor rule)’이라는 모델을 참고한다. 1993년 스탠퍼드대 존 테일러 교수가 제시한 이 원칙은 물가상승률과 경제성장률 등 거시지표를 기준으로 적정한 정책금리를 계산하는 방식이다.

테일러 준칙은 실제와 잠재 GDP의 차이인 ‘GDP 갭’과 현재와 목표 인플레이션율의 차이인 ‘인플레이션 갭’에 가중치를 부여해 기준금리를 결정한다. 예를 들어 물가상승률이 목표치를 초과하거나, 경제가 완전고용 상태일 경우에는 금리를 인상해 과열을 방지해야 한다고 본다.

이 준칙을 통해 중앙은행의 과거 정책이 적절했는지 평가할 수 있으며, 통화정책의 방향성과 일관성을 가늠하는 데에도 활용된다. 실제로 테일러는 시장의 신뢰를 위해 이런 원칙을 법제화하자는 주장도 펼친 바 있다.

 

전 세계적으로 현금 사용이 점차 줄어드는 추세다. 일부 선진국은 ‘현금 없는 사회’를 공식 목표로 설정하고 이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스웨덴의 경우, 전체 거래 중 현금이 차지하는 비중이 20% 미만으로 떨어졌다. 현금을 보유하지 않는 은행이 늘어나면서 강도가 금고를 털려다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체포되는 황당한 사례도 있었다. 덴마크는 자국 내에서 더 이상 지폐나 동전을 제조하지 않기로 하고, 필요할 경우 해외에 위탁 생산하는 방식으로 전환했다. 프랑스, 스페인, 벨기에, 이스라엘 등 일부 국가는 고액 현금거래를 법적으로 금지하는 제도를 도입했다.

비현금 사회의 주요 이점으로는 거래의 투명성, 운영의 효율성, 자산의 안전성, 그리고 사용자 편의성 등이 꼽힌다. 모든 자금 흐름이 전산망에 저장되기 때문에 뇌물이나 탈세 같은 불법 자금의 은닉이 어려워지고, 금융 범죄 억제에도 긍정적 효과가 기대된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현재까지 세계 각국에서 개발된 디지털 화폐의 종류는 700개가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가 긍정적인 측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금융 시스템이 완전히 디지털화되면 해킹이나 보이스피싱, 전자 사기와 같은 사이버 위협에 더 크게 노출될 수 있다. 또한 디지털 기기에 익숙하지 않은 고령층이나 장애인, 소득이 낮은 계층에게는 오히려 불편함을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도 존재한다. 개인의 거래 이력이 전산에 남기 때문에 사생활 침해 문제가 불거질 가능성도 있다.

우리나라 중앙은행인 한국은행은 완전한 현금 없는 사회로 가기 전 단계로 '동전 없는 사회'를 추진 중이다. 주요 유통업체들과 손잡고 현금 거스름돈을 고객의 전자지갑, 포인트, 선불카드 등으로 전환하는 시스템을 도입하고 있다. 거의 사용되지 않는 동전을 계속 제조하고 유통하는 데 큰 비용이 들기 때문이다.

한국은행이 매년 새 동전 생산에 들이는 예산은 500억 원을 넘는다. 현재 유통 중인 10원, 50원, 100원, 500원짜리 동전은 총 200억 개를 초과하지만, 많은 동전이 집 안 서랍 등에 방치되면서 실제로 회수되는 비율은 20%대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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